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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quiem 1. 라젠로스&엘피네스

비가 개인 지 채 얼마 되지 않은 습한 날씨가 을씨년스러웠다. 올려다본 하늘은 언제든 비가 다시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먹구름 전선이 부풀어 오른 듯 가득 덮혀 있었고, 우거진 숲의 잎파리들은 물을 잔뜩 머금은 모습이 마치 만개한 꽃을 보는 양 활발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마음이 진정되질 않는다."
라젠로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뉼 왕국 최고의 검객으로 이름을 떨치던 그는 '검성' 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으며 왕위 직속 호위기사장의 자리에까지 올라섰다. 전사로서는 더 할 나위없는 최고의 명예이지만 그것이 라젠로스의 마음의 전부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최고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던 그였지만 자신이 지극히 인간적인 감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 건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신지요."
척척하게 걸어오는 발소리의 정체가 왕실 관계자이거나 경비원일거라 생각하던 라젠로스는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귀족을 상징하는 보라색의 화려한 드레스, 허리를 꼿꼿이 세운 기개 있는 자세는 왕족만이 내뿜을 수 있는 신성한 아우라였다.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잡념에 빠져 엘피네스 공주의 행차를 몰라본 라젠로스는 곧바로 왕족에의 대한 예를 차리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경이시여. 소생과 그대밖에 없으니 딱딱한 예를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엘피네스는 따뜻한 미소로 진심을 담아 얘기했다. 라젠로스는 그럴 순 없다고 잠시 생각했지만 엘피네스의 온화한 표정이 그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할 수 없이 그는 정자세로 섰지만 그녀와 눈을 마주보지 못한 채 땅바닥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땅이 아직 굳질 않았습니다. 성실하게 검술 수련에 매진하는 것도 좋지만 나라의 중책을 맡으신 분이 다치기라도 하시면 큰일이 아니십니까."
엘피네스는 그가 하루도 빠짐없이 검술 훈련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라젠로스는 오늘 한 번도 검을 휘두르지 않았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좀 있었습니다."
라젠로스는 마음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엘피네스가 목전에 있을 때마다 복받쳐 올라오는 감정을 억눌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 기분의 정체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방출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천하의 검성이라는 자도 마음고생을 할 때가 있군요."
엘피네스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난스런 말투로 얘기했다.
"저도 한 사람의 인간입니다."
평민이 한 나라의 공주를 사랑한다는 건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대역죄에 해당할 정도의 행위였다.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도 결코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의 전부라고 여겼던 검의 극의에 달하였음에도 채워지지 않던 마음 한 구석의 공허함을 그녀만이 채워줄 수 있다는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후훗. 죄송해요. 저의 말본새가 조금 짓궂었던 것 같습니다."
엘피네스는 라젠로스가 들고 있던 검을 조심스레 빼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체구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검을 수직으로 위태롭게 들어올렸다. 그녀는 검날에 취한듯이 그 검을 빤히 바라보았다.
"라젠로스 경에게는 이 검이 있잖아요. 무기는 힘을 상징하지요. 저는 가끔씩 그런 힘을 가진 라젠로스 경이 부러울 때가 있었어요."
그녀의 말의 속뜻을 지금의 라젠로스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힘이 있으면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고, 책임질 수만 있다면 원하는 것을 가질 수도 있어요. 그 때의 저도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엘피네스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녀는 이윽고 칼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역시, 그런 라젠로스 경도 고민이 있다는 것을 보면……"
엘피네스는 다시 그에게 칼을 쥐어주었다. 얼마간 포개어진 엘피네스의 손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무언가도 역시 있는 것이겠죠?"
라젠로스는 어째서 그녀가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단순히 나를 힘을 가진 자라고 여겨 힘이 없던 시절의 자신이 떠올라서? 그럴 확률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라젠로스는 그것이 그녀가 의도한 것이었지는 확신할 수 없었어도 그녀의 말에 의해 얽힌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던 마음속의 갈등이 거짓말처럼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안녕히. 즐거웠습니다."
엘피네스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하지만 라젠로스는 따라 인사하지 않았다. 엘피네스는 그것을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뒤돌아섰다.
"아니요."
엘피네스는 약간 놀란듯 돌아보았다. 그는 자신만의 해답을 찾았다. 그것이 그녀가 의도했던 것이든 아니든, 그는 결국 자신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힘이 있으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말처럼, 책임질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엘피네스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엘피네스는 자신의 목 근처까지 다가온 칼날을 흘깃 바라본 후 라젠로스의 얼굴을 보았다. 한 층 더 날카로워진 눈매에서 비장한 여유가 느껴졌다.
"무슨……"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상황에 엘피네스의 눈동자가 불안과 긴장으로 일 초에 수십 번씩은 흔들렸다. 이 것은 라젠로스가 자신을 대할 때 그가 항상 짓고 있던 표정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항상 짓고 있던 표정을 지금의 그가 짓고 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간적인 상황 역전. 그것이 그녀가 말하던 힘이라는 것이었다.
"저는 여지껏 반쪽짜리 검사였습니다. 검을 다룰 줄만 알고 그것을 어떤 곳에 사용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항상 자신을 지켜오기 위해서만 힘을 키워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만족스러운 저를 만들어주지는 않았지요. 왜일까요? 그것은 당신이 말해주었습니다. 힘은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고,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태껏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힘을 사용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검으로서 최고의 자리까지 왔음에도 자신에게 만족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칼을 사용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엘피네스의 가슴이 급박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것이 목에 칼이 들어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라젠로스는 그런 엘피네스를 보면서도 자신의 마지막 말을 뱉기 전까지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미세한 움직임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사랑 하나면, 반 쪽인 제 마음을 전부 채우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이나 허세가 아니었다. 그는 항상 엘피네스가 곁에 있을 때만이 불안감과도 비슷한 공허함을 씻어내릴 수 있었다.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왕의 호위기사로써 가끔씩 공주와 만나 담소를 나눌 때마다 느낄 수 있던 기분이었다.
"……뭐랄까. 검성스러운 프로포즈네요."
긴장감 속에서 힘이 풀린 엘피네스는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라젠로스는 그제서야 칼을 거두었다. 그는 이제 엘피네스의 영롱한 눈망울을 거리낌 없이 바라볼 수가 있었다. 보석처럼 빛나는 그녀의 붉은빛 눈동자를 이렇게 직접 마주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나저나, 거친 남자가 취향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죠?"-

성 안을 지나던 라젠로스는 차드가 어떤 금발의 소녀와 얘기하고 있던 것을 발견했다. 그는 만난 적은 거의 없었던 차드이지만 또렷하게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왕실 도서관에 처음 갔을 때 왠 동그란 모노클을 끼고 있는 독특한 꼬마아이가 사서용 책상에 앉아 있었던 걸 보았는데 저런 꼬마가 사서였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라젠로스 씨가……"
그는 걷던 중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 같아 본능적으로 벽을 돌아서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에게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녀들의 말이 잘 들리진 않았지만 몇몇 단어만큼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차드 일행은 그가 엿듣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온 성 안이 발칵 뒤집혔죠 뭐."
그 말만은 라젠로스에게 또렷하게 들렸다. 본능적으로 상상하고 있던 나쁜 예감 탓에 그렇게 들려왔던 것인지도 몰랐다. 무슨 일인지 확실하게 알아야만 했던 그는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박차듯 달려갔다.
"무슨 일이냐."
"라, 라젠로스씨……?"
두 명의 소녀는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다짜고짜 차드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당겼다.
"자, 잠깐! 아… 아파요!"
금발머리 소녀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차드는 계속해서 아픔을 호소했지만 흥분한 라젠로스에게 그녀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 이러다 죽겠어요 라젠로스씨!"
금발 소녀가 다급한 듯 소리쳤다. 라젠로스는 그제서야 자신이 차드의 발이 닿지도 않을 정도로 멱살을 강하게 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이윽고 차드를 놔주었다.
"켁…… 켁……."
그러고서도 그녀는 오른손으로 목을 잡고서 천식 환자마냥 십수번 기침을 반복하였다. 그는 약간의 미안한 감정을 뒤로 한 채 차드의 호흡이 진정될 쯤 다시 얘기를 꺼냈다.
"다시 묻겠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지?"
소녀들은 대답을 하지 못 하고 고개를 숙이고만 있을 뿐이었다.
"단순히 험담을 하고 있었나?"
라젠로스는 솔직한 심정으로 차라리 그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녀들은 당황한 기색으로 부정하듯 손을 저었다. 두 소녀는 서로 잠시 고민하다가 이윽고 차드가 금발 소녀의 손을 당겼다.
"죄, 죄송해요! 곧 알게 되실 거에요!"
차드는 그 말만을 남긴 채 뒷걸음질 치면서 인사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는 옆에 있던 소녀와 함께 쏜살과도 같이 뛰쳐 나갔다. 차드는 도무지 그 말을 본인에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라젠로스는 그녀들을 뒤따라가지 않았다. 하고 있던 얘기가 무엇인지, 그녀들의 행동에서 이미 짐작에서 확신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라젠로스는 자신의 방의 문을 열었다. 방에는 이미 엘피네스가 들어와 있었다. 그늘진 어둠 사이로 그녀의 퉁퉁 부은 듯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불도 안켜고 뭐하고 있어."
라젠로스는 애써 담담한 척 얘기하며 엘피네스의 옆에 앉았다. 가까이 있으니 그녀가 조그맣게 울먹이고 있었다는걸 알 수 있었다.
"그치만…… 이런 모습 보여주고 싶진 않은걸."
"전하께선 뭐라셔."
"……이미 알고 있었구나. 머리 끝까지 잔뜩 화가 나셔가지고……."
엘피네스는 코를 훌쩍 거리며 얘기했다.
"대판 싸우다 이런 꼴이야."
"……."
"그렇게나 완고하신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 봐."
라젠로스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엘피네스를 이렇게나 몰아넣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혹시라도 라젠로스가 잘못 되기라도 하면 나… 모래탑처럼 무너져 버릴 거야. 그런 생각 할 때마다 무섭고 서러워."
한 달 여간 편하게 말을 주고받게 된 이후에도 엘피네스는 귀족스러운 말투를 사용했었다. 본래부터 사용하던 말투가 몸에 배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엘피네스는 그저 평범한 동년배의 소녀였다. 엘피네스가 그만큼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단 진정하자. 네 모습 지금 매우 위태로워 보여."
"미안… 지금 내 모습 나답지 않다는거 알고 있어. 하지만……"
"난 내가 행한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은 그냥 그런 상황일 뿐이야."
엘피네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의 라젠로스는 모든 책임을 자신이 떠맡으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은 공주이기에 심한 처벌은 면할 것이라 생각하고.
"도망치자 라젠로스… 난 정말 괜찮으니까!"
"방금 내가 한 말 뭘로 들은거야? 나의 책임의무야. 너에게도 책임을 돌릴 순 없어."
라젠로스도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어떻게 될 지언정 아픔은 언젠가는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때 가서 또다른 인연을 만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도망친다면 성공 여부조차 불확실한데다 성공할지언정 도망친 자들에겐 위태로운 일상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바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거야? 너 혼자만 사랑한게 아닌데……."
"내가 쟁취하고자 한 댓가를 치르는 거야. 너도 네 나름대로의 책임을 치르겠지. 도망치면 난 위선자가 되. 거 참 남자가 했던 말을 좀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엘피네스는 한 달 전 라젠로스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 때의 자신은 책임질 수 있다면 원하는 것을 힘으로 쟁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로인해 라젠로스는 지금 이 일이 자신이 쟁취한 것에 대한 책임의 매듭을 짓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라젠로스 님. 전하께서 부르시옵니다."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문 밖에서 어떤 사내가 얘기하였다.
"곧 가겠다 전하여라."
"예."
그 말을 들은 라젠로스는 한 층 더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일어났다.
"라젠로스!"
엘피네스는 아직 할 얘기가 더 있었다. 그런 생각은 틀린 것이라 설득해야 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돌려세우려 했지만 라젠로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
 
왕실은 침묵의 도가니였다. 그 어느 누구조차 감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방구석을 가득 채운 화려한 장식품들만이 그 위의를 내뿜고 있을 뿐 공주의 비통한 절규가 아직 떠나가지 않은 공기 속에 모두 호흡이 단절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그 아이가 내게 이렇게까지 자기 감정을 표현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던 플람네스 왕의 무거운 공기를 걷어내는 한마디는 적잖이 당황하고 있다는 기색이 묻어났다.
"성왕이신 전하께서 따님의 진심을 모를리는 없을 줄 알리옵니다."
재상의 말대로였다. 진심이 담긴 여인의 한 맺힌 울부짖음이 아니라면 이 소용없이 넓기만 한 왕실 전부를 슬픔으로 가득 채울 수는 없었다. 플람네스의 마음은 앞서부터 공주의 쪽으로 기울어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가 진정으로 고민하고 있던 것은 왕으로서의 입장 상 이번 일을 대강 넘어갈 경우 발생할 신분 질서를 염려한 국정 신료들의 반발이었다.
"내 본심은 공주의 편이나, 왕이라는 자리에 있는 실정 상 정치의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소. 어쩌면, 방금 전 과인이 화를 냈던 것은 공주의 편을 들어줄 수 없는 힘없는 나 자신에의 대한 자책감에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오."
플람네스의 본심을 안 재상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편으로, 이런 인간적이고 자애로운 왕을 섬기게 된 것에 뿌듯함을 느꼈다.
"한 번, 저의 조언을 들어보시겠사옵니까."
재상은 이런 상황에 대한 가장 적합하고 합리적인 방법을 떠올렸다.
"묘책이 있소?"
재상은 한번의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고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왕은 재상의 지혜로움에 감탄하며 그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전하, 그동안 강녕하셨나이까."
자신의 운명을 휘두를 수 있는 자를 눈 앞에 둔 라젠로스의 비장함은 서리처럼 얼어붙은 자신의 몸조차 뜨거운 화로에 달궈진 쇳덩이처럼 후끈 달아오르게 하였다. 한 편 플람네스는 침착한 듯 앉아있었으나 그의 이마에 힘줄이 내돋쳐 있을 정도로 분노를 속으로 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왕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일어나 라젠로스를 노려보았다. 그는 이윽고 지팡이를 라젠로스의 발 밑에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너의 그 경망스럽고 몰상식한 행동은 이미 온 성 안에 퍼져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이다. 내 너의 성실함과 지성을 믿고 호위기사의 자리까지 앉혀놨거늘, 감히 네놈이 지금 나를 우롱했단 말이더냐!"
왕의 분노는 터진 봇물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라젠로스는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섬겼으나 이토록 그가 노했던 적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어떠한 벌이든 달게 받겠사옵니다."
라젠로스에게 어떠한 요행이나 용서를 기대하는 마음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잠시나마 엘피네스와 사랑하고, 호위기사장의 자리에서 왕을 지킬 수 있었던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내 지금 당장에라도 너의 사지를 육분할로 찢어발겨야 비로소 속이 풀리겠으나, 호위기사장으로서의 품위를 생각해 내 친히 아량을 한번 베풀도록 하겠다."
왕은 말하던 중 마치 가면을 바꿔 쓴 듯이 표정을 싹 바꾸었다. 무표정이 된 그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생각도 읽어낼 수 없었다.
"이런 불미스런 자를 나의 가장 가까이에 앉혀놓았다는 것은 내 일생일대의 가장 치욕적인 업보이고 망신이다. 네놈의 낯짝을 보고 있다간 내 화를 내가 견디지 못할 것 같구나. 하여 이 자를 메이우퀴르로 추방시킬 것을 명하겠소. 훗날에라도 만일, 네가 나의 왕국에 발 한발자국이라도 들이댔다간 그 때야말로 애수따윈 없을줄 알아야 할 것이니라."
"옳은 판단이시옵니다, 전하. 마땅히 그는 죽을 죄를 지은 것은 분명하오나 이대로 죽이기에는 아까운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그를 무주지인 메이우퀴르 섬으로 추방시키는 것은 본 상황에 맞는 가장 탁월한 선택이 아닐까 하옵니다."
재상이 옆에서 거들었다.
"황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라젠로스는 전하의 은혜에 망극하여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허나 한 편으로 그것은 엘피네스와의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그의 뒤숭숭한 마음은 결코 해소되지 않았다.-

애오라지 인간의 생리요소에 필요한 물건들만이 구비되어 있는 자그마한 독방이었다. 그 와중에도 엘피네스는 라젠로스에 대한 걱정의 격동에 무너져내릴 듯 불안하기만 했다. 모든 곳이 철저히 막혀 있는 이 공간이 엘피네스의 답답한 마음을 가중시키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방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사식을 받을 시간대는 아니었다.
"엘피네스야. 잘 있느냐."
목소리의 정체는 놀랍게도 아버지 플람네스였다. 아까전까지의 엄격하고 격앙된 목소리와는 사뭇 다르게 아버지의 자상함과 따뜻함이 풍겨져왔다.
"아버지… 라젠로스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녀는 라젠로스의 안위를 근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는 메이우퀴르로 떠났다."
"메이우퀴르라면……"
엘피네스는 그 곳의 이름을 듣고 사뭇 놀라는 눈치였다.
"엘피네스야. 내 긴히 할 말이 있구나."
열쇠가 찰칵 하는 소리를 내며 이윽고 문을 열자 듣기싫은 낡은 나무끼리의 마찰 소리가 독방을 가득 채웠다. 플람네스 왕은 어두컴컴한 독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는 조용히 엘피네스에게 무언가를 건냈다.
"이, 이건?"
"다음날 새벽의 배편이다. 너도 라젠로스를 따라가거라. 다만 결코 왕성 내의 어느 누구에게도 발각되어서는 안되느니라. 너는 그저 나조차도 알지 못 하도록 탈출하는 것이다."
엘피네스는 잠시동안 그걸 받기를 망설였다. 아버지의 손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못난 아비가 네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로구나."
엘피네스는 자신이 잠시라도 아버지를 원망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플람네스는 본받아야 마땅할 최고의 정치가이자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 잘 간직할게요.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
엘피네스는 배편이 쥐어진 아버지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그걸로 충분하단다."-

 

by 청이 | 2011/12/27 20:53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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